달러 이야기 - 홍익희
1. 개요
<달러 이야기>는 2015년 배재대학교 교수이자 전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인 홍익희가 저술한 경제 역사서이다. 이 책은 단순한 화폐사를 넘어, 달러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계 경제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그 이면의 역학 관계를 조명한다. 특히, 미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달러가 수행한 역할과 그 과정에서 유대 자본이 미친 영향을 심도 있게 파헤친다. 저자는 32년간의 KOTRA 근무 경험과 유대인 경제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달러의 기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한 줄 소개: 달러의 탄생과 진화 과정을 통해 세계 경제 패권의 이동과 그 이면에 숨겨진 권력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역작.
2. 저자: 홍익희
홍익희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1978년 KOTRA에 입사했다. 이후 32년간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뉴욕, 파나마, 멕시코, 밀라노 등 세계 각지의 무역관에서 근무하며 국제 경제의 현장을 직접 경험했다. 특히 유대인들과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그들의 경제사와 금융 시스템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0여 년간 유대인 경제사를 연구한 끝에 《유대인 경제사》 10부작을 집필했으며, 그 축약본인 《유대인 이야기》는 2013년 예스24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는 배재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
- 《한국경제의 절묘한 시나리오》(1995)
- 《21세기 초 금융위기의 진실》(2010)
- 《유대인, 그들은 우리에게 누구인가》(2010)
- 《유대인 이야기》(2013, 예스24 올해의 책)
- 《유대인 창의성의 비밀》(2013)
- 《세 종교 이야기》(2014)
3. 책의 전체 흐름
본서는 달러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사의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서술한다. 크게 4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달러와 관련된 경제사를 살펴본다.
- 달러 이전의 시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그 배경이 된 유럽의 향신료 무역, 북미 대륙 원주민들의 다양한 물품화폐, 그리고 유대인들의 초기 미국 정착 과정을 다룬다.
- 미국 독립과 달러의 탄생: 독립전쟁의 발발과 재정 확보를 위한 대륙지폐 발행, 그리고 초인플레이션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살펴본다. 이후 미국 연방정부의 수립과 달러의 공식 화폐 채택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다.
- 미국 경제의 성장과 금융 시스템의 발전: 중앙은행 설립 논쟁과 두 차례의 설립 및 폐쇄 과정, 골드러시와 산업혁명,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과 제이피 모건 등 유대계 금융 자본의 부상을 다룬다.
- 세계 대공황과 달러의 기축통화 등극: 1907년 공황과 연방준비제도(FRB)의 설립,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 패권 강화, 1929년 대공황과 뉴딜 정책, 그리고 브레튼우즈 체제 성립을 통해 달러가 세계 기축 통화로 자리 잡는 과정을 설명한다.
각 장은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시대적 배경과 경제적 의미를 함께 제시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특히, 저자는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과 그들이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며, 이들의 역할을 객관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한다.
4. 상세 요약
4.1. 후추와 신대륙 발견 (1장)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단순히 새로운 땅을 찾은 지리적 사건을 넘어, 세계 경제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당시 유럽은 동양의 향신료, 그중에서도 특히 후추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이었다. 후추는 육류를 보존하고 맛을 내는 데 필수적인 향신료였으며, 금과 같은 가치를 지닐 정도로 귀했다. 그러나 육로를 통한 향신료 무역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고, 유럽인들은 새로운 해상 루트를 개척해야만 했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도달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고,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아 항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자금 지원과 항해 기술 제공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
4.2. 원시 화폐와 맨해튼 구입 (2장)
신대륙 발견 초기, 북미 대륙에는 다양한 원주민 부족들이 각자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은 조가비 구슬, 담배, 쌀, 비버 가죽 등 다양한 물품을 화폐로 사용했다. 특히 비버 가죽은 유럽에서 고급 모피로 인기가 높아, 백인들과 원주민 간의 주요 교역 품목이 되었다. 1626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인디언들로부터 24달러 상당의 물품(조가비 구슬, 유리구슬, 옷감, 주전자, 단검 등)을 주고 맨해튼 섬을 구입했다. 이는 원시 화폐가 근대 경제 시스템에 편입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2]
4.3 청교도와 유대인의 만남 (3장)
종교적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청교도들은 유대교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두 종교 모두 구약을 중시하고,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며 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가치관을 공유했다. 이들은 서로에게 호의적이었고, 청교도들은 유대인 이민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덕분에 유대인들은 유럽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얻게 되었다. 미국 건국 초기부터 유대인들은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3]
4.4 미국 최초의 지폐와 통화 조례 (4장)
17세기 후반, 북미 식민지에서는 자체적인 화폐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이었다. 유럽에서 유입된 금화, 은화와 함께 다양한 물품화폐가 통용되었지만, 금, 은의 부족과 물품화폐의 한계로 인해 경제 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식민지 정부들은 독자적으로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690년 매사추세츠 식민지 정부는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최초의 지폐를 발행했다. 그러나 무분별한 지폐 발행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영국 정부는 1751년 통화 조례를 통해 식민지의 지폐 발행을 금지했다. 이는 식민지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독립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4]
4.5 독립전쟁과 대륙지폐 (5장)
1775년,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대륙회의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대륙지폐'(Continental currency)를 발행했다. 그러나 대륙지폐는 아무런 담보 없이 발행되었고, 과도한 발행으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 결국 대륙지폐는 가치를 상실했고, "대륙지폐만큼이나 가치 없는"(Not worth a Continental)이라는 관용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독립 이후 미국은 화폐 시스템을 정비하기 위해 1785년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달러'를 공식 화폐 단위로 결정했다.[5]
4.6 미국 헌법과 연방정부 (6장)
독립 이후 미국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제정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을 중심으로 한 연방주의자들과 토머스 제퍼슨을 중심으로 한 주권주의자들 간의 격렬한 논쟁 끝에 연방헌법이 제정되었다. 1789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아메리카합중국(USA)이 탄생했다. 한편, 뉴욕 월가는 금융과 정치의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4.7. 중앙은행 설립 논쟁 (7장)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을 모델로 하여 미국에도 중앙은행을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조절하고, 정부의 재정을 지원하며, 경제 안정을 도모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토머스 제퍼슨 등 반(反)연방주의자들은 중앙은행이 소수 금융 엘리트들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정부의 권력을 지나치게 강화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반대했다. 결국 1791년, 20년 기한의 제1미합중국은행이 설립되었지만, 1811년 존속 기한 만료와 함께 문을 닫았다.[7]
4.8 앤드루 잭슨과 중앙은행 폐쇄 (8장)
1812년 미영전쟁 이후, 통화 부족과 인플레이션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1816년 제2미합중국은행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중앙은행이 소수 금융 엘리트들의 이익만을 대변한다고 비판하며, 1832년 은행의 재인가를 거부했다. 그는 "금융기관은 군대보다도 위험하다"고 말하며, 중앙은행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결국 제2미합중국은행은 1836년 문을 닫았고, 이후 미국은 중앙은행 없는 자유은행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8]
4.9. 골드러시와 서부 개척 (9장)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시작되었고, 이는 미국 서부 개척과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서부로 몰려들었고, 샌프란시스코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골드러시는 철도 건설을 촉진하고,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등 미국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유대인 청년 리바이 슈트라우스는 튼튼한 천막 천으로 만든 청바지를 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9]
4.10. 산업혁명과 기술 스파이 (10장)
미국 산업혁명은 영국으로부터의 기술 유출, 특히 방적 기술의 도입으로 시작되었다. 사무엘 슬레이터는 영국의 방적기 기술을 암기하여 미국으로 건너와 1790년 로드아일랜드에 최초의 방적공장을 설립했다. 프란시스 로웰은 영국의 직조기를 모방하여 더욱 발전된 형태의 직조기를 개발하고, 방적, 직조, 염색을 통합한 일관 생산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기술 혁신은 미국의 섬유산업 발전을 이끌었고, 나아가 제조업 전반의 성장을 촉진했다.[10]
4.11 로스차일드 가문과 금융 제국 (11장)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금융계를 장악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 시장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제이피 모건 등 미국의 금융가들과 협력하여 철도, 철강, 석유 등 주요 산업에 투자하고, 미국 국채를 인수하는 등 미국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본은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1]
4.12 미국의 경제 패권 (12장)
19세기 후반,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서부 개척을 통해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철도 건설은 대륙 횡단을 가능하게 했고, 철강 산업은 도시 건설과 제조업 발전을 이끌었다. 188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공업 생산량은 영국을 추월했고, 미국은 세계 최대의 공업국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은 유럽으로부터의 대규모 이민과 자본 유입, 그리고 풍부한 천연자원 덕분이었다.[12]
4.13 세계 최초의 공황과 금은복본위제 논쟁 (13장)
1873년, 미국과 유럽에서 동시에 발생한 경제 공황은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공황이었다. 철도 산업에 대한 과잉 투자와 투기, 그리고 유럽의 경제 불황이 겹치면서 발생한 이 공황은 금융 시스템 붕괴와 대량 실업을 초래했다. 특히, 1893년 공황은 은본위제 폐지와 금본위제 채택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농민과 광산업자들의 반발을 샀다.[13]
4.14 제이피 모건과 금융자본주의 (14장)
19세기 말, 미국 경제는 소수의 금융 자본가들에 의해 지배되는 금융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제이피 모건은 은행, 철도, 철강, 통신 등 주요 산업을 장악하며 '금융 황제'로 군림했다. 그는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거대한 트러스트를 형성하고,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그의 독점적 행태는 사회적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반독점법 제정으로 이어졌다.[14]
4.15 1907년 공황과 연방준비제도(FRB) 설립 (15, 16장)
1907년, 뉴욕 증시 폭락과 은행들의 연쇄 파산으로 인해 또 한 번의 금융 공황이 발생했다. 이 위기 상황에서 제이피 모건은 개인적인 자금력과 영향력을 동원하여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고, 사실상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했다. 이 사건은 중앙은행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였고, 결국 1913년 연방준비제도(FRB) 설립으로 이어졌다. FRB는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으로 구성된 중앙은행 시스템으로, 통화 정책을 수립하고 금융 시스템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FRB는 민간 소유의 은행들이 주주로 참여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설립 초기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15][16]
4.16 유대계 자본과 인력의 기여 (17장)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미국의 경제, 산업,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은 주로 뉴욕을 중심으로 정착하여 의류산업, 금융업, 유통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독일계 유대인들은 금융, 백화점, 의류 산업 등을 주도하며 미국 경제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또한,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 예술가, 지식인들은 미국의 학문과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17]
4.17. 반유대주의의 그림자 (18장)
유대인들의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영향력 확대는 미국 내 반유대주의 정서를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1920년대에는 KKK(Ku Klux Klan)와 같은 극우 단체들이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선동했고, 헨리 포드와 같은 저명인사들도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쏟아냈다. 이러한 반유대주의 정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유대인들은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워야 했다.[18]
4.18 포드주의와 대량생산 (19장)
헨리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대량생산 시스템을 도입하여 자동차 산업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저렴한 가격의 모델 T를 대량 생산하여 자동차를 대중화시켰고, 이는 미국의 산업 구조와 사회 문화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포드의 대량생산 시스템은 '포디즘'이라는 용어로 불리며, 20세기 미국 산업의 상징이 되었다.[19]
4.19 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부상 (20장)
1차 세계대전은 유럽 경제를 황폐화시킨 반면, 미국 경제에는 호황을 가져다주었다. 미국은 전쟁 기간 동안 연합국에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를 공급하며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전쟁 후에는 유럽 재건 사업에 참여하면서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부상했다. 이로써 세계 경제의 중심축은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동했고, 미국은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20]
4.20 대공황의 전조 (21장)
1920년대 미국 경제는 '광란의 20년대'라고 불릴 정도로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자동차, 라디오 등 새로운 소비재 산업이 성장하고, 주식 시장은 투기 열풍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황은 과잉 생산과 소비, 그리고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이라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주식 시장의 과열과 투기적 거래는 거품 붕괴의 위험을 높이고 있었다.[21]
4.21. 대공황의 발발과 확산 (22장)
1929년 10월, 뉴욕 증시 대폭락을 시작으로 대공황이 발생했다. 주가 폭락, 은행 파산, 기업 도산, 대량 실업 등 경제 시스템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공황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193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대공황의 원인으로는 과잉 생산, 소비 부족,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 정부의 잘못된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22]
4.22.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과 유대인 (23장)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 극복을 위해 '뉴딜'(New Deal) 정책을 추진했다. 뉴딜 정책은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을 통해 유효 수요를 창출하고,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루스벨트는 유대인들을 중용하여 뉴딜 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미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금융 개혁, 노동자 권익 보호, 사회 보장 제도 도입 등은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23]
4.23 통화주의와 대공황 (24장)
밀턴 프리드먼은 그의 저서 《대공황》에서 1930년대 대공황이 연방준비제도(FRB)의 통화 긴축 정책 때문에 더욱 심화되고 장기화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FRB가 통화 공급을 충분히 늘리지 않아 경제가 디플레이션 악순환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그의 통화주의 이론은 이후 경제 정책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24]
4.24 보호무역주의의 역설 (25장)
대공황 이후 세계 각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강화했다. 미국은 1930년 홀리-스무트 관세법을 제정하여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대폭 인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무역주의 정책은 세계 무역을 위축시키고, 경제 회복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보호무역주의는 국가 간 갈등을 심화시키고, 2차 세계대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25]
4.25 금본위제 폐지와 달러 가치 (26장)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 극복을 위해 금태환 정지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하락시켜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국내 통화량을 늘려 경기 부양을 꾀하려는 목적이었다. 금태환 정지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이어졌고, 이후 세계는 변동환율제 시대로 접어들었다.[26]
4.26 세제 개혁과 부의 재분배 (27장)
루스벨트는 대공황 극복과 사회 불평등 해소를 위해 세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소득세 최고 세율을 79%까지 인상하고, 상속세 최고 세율도 77%까지 올렸다. 또한, 법인세, 초과이윤세 등 기업에 대한 세금도 강화했다. 이러한 세제 개혁은 부의 재분배 효과를 가져왔고, 중산층 형성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업의 투자 의욕을 저하시키고, 경제 성장을 둔화시키는 부작용도 초래했다.[27]
4.27. 뉴딜 정책과 주식 시장 (28장)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과 금융 개혁은 주식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33년 루스벨트 취임 이후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급등했고,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1937년, 연준의 긴축 정책과 재정 지출 축소로 인해 미국 경제는 다시 침체에 빠졌고, 주가는 폭락했다. 이를 '루스벨트 불황'이라고 부른다.[28]
5. 핵심 개념 및 아이디어
- 금본위제: 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연동시키는 제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국제 통화 시스템의 근간이었으나, 대공황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폐지되었다.
- 대공황: 1929년 미국 증시 붕괴로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 불황. 과잉 생산, 소비 부족, 금융 시스템 불안정, 정부의 잘못된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 뉴딜 정책: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 극복을 위해 추진한 경제 정책.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 사회 복지 프로그램 확대, 금융 시스템 개혁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 브레튼우즈 체제: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을 통해 구축된 국제 통화 시스템. 달러를 기축 통화로 하고, 각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했다.
- 금융자본주의: 금융 산업이 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금융 자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 체제. 19세기 말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 연방준비제도(FRB): 미국의 중앙은행 시스템.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과 연방준비제도이사회로 구성되며, 통화 정책을 수립하고 금융 시스템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 모건화(Morganization): 제이피 모건이 고안한 금융 기법. 부실한 철도회사의 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뒤, 경영 정상화를 통해 가치를 높여 되파는 방식이다.
- 통화주의: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한 경제 이론. 통화량 조절을 통해 경제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보호무역주의: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높이거나 수입량을 제한하는 정책. 대공황 이후 세계 각국에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었으나, 이는 세계 무역을 위축시키고 경제 회복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 삼각무역: 노예, 설탕, 럼주 등을 거래하는 대서양 삼각 무역은 미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의 경제 성장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노예 무역의 참상을 야기했다.
6. 평가 및 반응
《달러 이야기》는 방대한 역사적 사실과 경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달러의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낸 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금융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되어 있으며, 미국 경제사와 달러의 역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또한, 유대인들의 역할과 영향력을 객관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조명하여 독자들에게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다만,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음모론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로스차일드 가문과 유대계 금융 자본에 대한 서술은 과장되거나 왜곡된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7. 여담 및 트리비아
- 저자 홍익희는 KOTRA에서 32년간 근무하며 다양한 국가에서 경제 현장을 경험했다.
- 《유대인 이야기》는 예스24 '올해의 책'으로 선정될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 달러를 '벅'(buck)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초기 식민지 시대에 수사슴 가죽(buckskin)이 화폐 대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 미국 최초의 지폐는 은행이 아닌 식민지 지방 정부에서 발행되었다.
- 미국 독립선언, 영국과의 평화협정, 연방헌법에 모두 서명한 인물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 SAT는 유대인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을 막기위한 차원에서 개발되었다는 설이있다.
-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제1미합중국은행은 20년의 존속 기한을 가지고 설립되었다.
8. 관련 문서
- 금본위제
- 대공황
- 뉴딜 정책
- 브레튼우즈 체제
- 연방준비제도
- 제이피 모건
- 존 록펠러
- 로스차일드 가문
9. 각주
[1] 중세 유럽에서 향신료는 매우 귀한 상품이었고, 이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이러한 경쟁의 산물이었다.
[2] 당시 맨해튼 섬은 인디언 부족 레나페족의 땅이었다. 이들은 백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결국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비극을 겪었다.
[3] 청교도들은 구약성서를 중시하고,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등 유대교와 유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공통점은 양측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에 기여했다.
[4] 식민지 정부의 지폐 발행은 통화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
[5] 스페인 은화 '다레라'는 당시 신대륙에서 널리 통용되던 화폐였다. '달러'라는 명칭은 '다레라'의 영어식 발음에서 유래했다.
[6] 해밀턴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제퍼슨은 주정부의 자치권을 옹호했다. 이들의 대립은 미국 정치의 양대 세력 형성으로 이어졌다.
[7] 제1미합중국은행은 민간은행이었지만, 정부의 재정을 지원하고 화폐 발행을 담당하는 등 사실상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했다.
[8] 잭슨 대통령은 중앙은행을 '화폐 권력'이라 부르며 혐오했다. 그는 중앙은행이 소수 금융 엘리트들의 이익만을 대변한다고 믿었다.
[9] 리바이스 청바지는 질기고 튼튼하여 광부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청바지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상징적인 의복이 되었다.
[10] 슬레이터는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영국의 방적 기술을 미국에 도입하여 섬유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11]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 유럽 금융계를 장악한 유대계 금융 가문이다. 이들은 미국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2] 미국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다. 철도 건설은 대륙 횡단을 가능하게 했고, 서부 개척을 촉진했다.
[13] 1873년 공황은 '장기 불황'(Long Depression)이라고도 불린다. 이 공황은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를 초래했다.
[14] 모건은 '금융 황제'로 불리며 미국 경제를 쥐락펴락했다. 그는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거대한 트러스트를 형성하고,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15] 1907년 공황은 중앙은행의 부재로 인해 더욱 심각해졌다. 이 사건은 연방준비제도(FRB) 설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6] FRB는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과 연방준비제도이사회로 구성된다. FRB는 통화 정책을 수립하고 금융 시스템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17] 유대인들은 금융, 유통, 의류,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미국의 경제, 사회,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8] 반유대주의는 20세기 초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현상이었다. 유대인들은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워야 했다.
[19] 포드시스템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시대를 열었다. 이는 미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20]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전쟁은 미국의 산업 생산 능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고,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21] 1920년대 미국 경제는 과도한 투기와 거품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주식 시장은 투기 광풍에 휩싸였고, 이는 결국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22] 대공황은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23]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미국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경제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뉴딜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24] 프리드먼은 통화량 조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통화주의 이론은 이후 경제 정책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25] 보호무역주의는 세계 무역을 위축시키고, 경제 회복을 지연시켰다. 이는 결국 2차 세계대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26] 금태환 정지는 달러 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경기 부양에 기여했다.
[27] 루스벨트의 세제 개혁은 부의 재분배에 기여했지만, 기업의 투자 의욕을 저하시키는 부작용도 낳았다.
[28] 루스벨트 불황은 뉴딜 정책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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